ㆍ상세내용
1900년 충남 예산에서 아버지 박현주와 둘째 부인인 어머니 이학규 사이에서 태어난 박헌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눈을 뜬다. 다음 해, 미국 유학이 좌절되자 일본 유학을 꿈꾸고 9월 일본으로 건너가나 수배 중이었던데다 학비조달 문제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자 11월에 상해로 망명, 사회주의운동에 입문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기록에 밝혀져 있듯, 그는 일제의 간첩도 미제의 간첩도 아니었다. 오히려 우익 쪽의 공격대로 철두철미한 소련파였으며 그것이 그의 결함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을, 해방 후에는 조선 민중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가장 앞장서서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박헌영, 그는 뼛속까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지만 이승만의 파시즘에 맞서 민중이 주인 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들고자 애썼던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다